본문 바로가기
경상도 멋과 맛

대구 수성구 여행 모명재 -- 명나라 장군 두사충 이야기

by 하늘하늘하늘하늘 2020. 3. 11.
728x90

대구 광역시 수성구 만촌사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명나라 장군의 이야기가 머무는 곳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귀화한 명나라 장군'두사충'과

그를 기리기 위한 재실인

모명재  가 있답니다.

오늘은 400여 년이 넘는 역사이야기를 찾아

수성구의 모명재 사연을 풀어  봅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군 두사충의 사연을 담고 있는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모명재에서 역사를 돌아봅니다.


조선시대에 귀화한 명나라장군 두사충과 그를 기리기 위한

재실인 모명재가 있습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관광시 한국의 역사가 된

400년이 넘는 그 때 이야기를 찾아 모명재를 돌아 보았답니다.


모명재로 가는 길에는 명나라 장군 두사충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곳은 명정각으로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이랍니다.

두한필은 효행으로 조선시대 종3품인 통훈대부 규장각 직제학의 벼슬을

증직받았다 합니다.

명정각에는 정려비와 편액이 걸려 있으며 1912년에 건립되었답니다.

두사충 장군의 귀화 후 그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있어서 

효행과 함께 한민족과 같이 하였군요.


 

명정각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모명재를 만납니다.

모명재 慕明齋란 풀이하면 "명나라를 사모하는 재실"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라고...

임진왜란 때와 정유재란 때 2차례 조선을 돕기 위한 원군으로 들어와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명나라 장군 "두사충" 장군을 기리는 재실이랍니다.

재실의 입구는 만동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만동문을 지나 모명재를 만납니다.

400여년이 넘는 역사이야기를 만나러 들어가니 수성구 문화해설사께서

우리에게 옛 이야기와 모명재 이야기를 들려주시네요.

대문인 만동문의 이름은

'백천유수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짧은 한문실력으로 직역 풀이를 한다면

백개의 냇물은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는 의미인가요?

즉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의미로

'근본은 잊지 않겠다'는 뜻이랍니다



모명재입니다.

1912년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하였으며 1966년에 수리를 하였다합니다.

조선시대에 귀화한 명나라 장군의 후손들이 그 대가 끊기지않고 잘 정착을 하였군요.


재실은 4칸 건물로 중앙의 2칸은 강당마루이고

좌우에 방이 있는 구조입니다.

강당에는 기문과 많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겨울날 햇살이 내려 앉는 모명재의 아침은 400여 년 전에 귀화한

명나라 장군 두사충의 혼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문화해설사의 두사충 장군과 모명재 그리고 두사충 장군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두사충 장군의 귀화는 정유재란 때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을 보좌하는 부장군으로

참전 후 전쟁 종료 후 두 아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하였다 합니다.  


재실 앞에 서 있는 문인상입니다.

문인상의 모습이 명나라 사람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후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일로 모명재를 건축하였다 하니

조선에서 성공적으로 정착을 한 모습입니다.


두사충은 누구인가?

명나라 두릉 사람으로 호는 모명이라 합니다.

모명이란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요.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과 함께 '수륙지획주사'로 조선에 왔는데

이 직책은 군사들이 진지를 구축할 때 위치 선정을 맡은 직책이라 합니다.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에 파병을 와 수군연합으로 왜군을

물리칩니다.

전쟁이 끝나자 함께 온 두 아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하였는데,

이때 이미 명나라의 기운이 쇠퇴하여 머지않아

망할 것을 미리 예측한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답니다.




모명재의 기둥에는 정유재란 때 수군으로 같이 전쟁에 참여한 이순신 장군의 지어준

봉정두복야라는 한시가 주련으로 걸려 있습니다.


두사충과 이순신 장군의인연

두사충은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는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합니다.

따라서 조선수군과 합동작전시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하였고

당시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합니다.


모명재 앞에는 이순신 장군과 모명재 장군의 우정을 알리는

동상이 같이 있군요.

두사충 장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2번에 걸쳐 파병참전을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외국의 장군이 수만리 길을 달려와 두 번씩이나

도와준 사실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현했다 합니다.


이순신장군의 명나라 장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표현된 한시가

모명재의 기둥에 주련으로 붙어 있답니다.

두 장수가 전쟁을 하면서 나라를 떠나 군인으로써 우정을 쌓으며

전쟁의 승리를 위해 고민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장군에게 써준 한시를 한번 읽어 봅니다.


두복야에게 드리는 글


북쪽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고락을 함께 했고

동쪽으로 다사 와서는 생사를 함께 하였네

성 남쪽 타향의 밤 달빛 밝은데

오늘 한잔 술로 정을 나누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작전을 수립하고 고민하는 장군의 만남에

조촐한 한 잔의 술을 주고 받으며

남자로써 군인으로써 장군으로써 서로를 격려하고 우정을 돈독히 하였군요.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위치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 장군의 귀화이야기와

후손들이 조상을 섬기고 기리는 마음으로 건축한 모명재 이야기는

우리의 수성구 여행길의 또 다른 추억의 시간이었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