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도 멋과 맛

군산가볼만한곳 -- 구 조선은행(현 근대건축관)

by 하늘하늘하늘하늘 2022. 2. 18.
728x90

근대화 시대 - 일제 강점기 때 많은 흔적이 남은 군산시 입니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반복되니 않는 역사를 꾸려가고자

시설을 보존하며 나라사랑의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고 있지요.

오늘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건물에 대한 이야기로 군산소식을 전합니다.

 

군산 근대건축관 -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옛 군산역이 있는 군산 내항근처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많은 

건물들이 보존되어 현실에 적합한 형태로 내부를 개조하여 

교훈을 주는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입니다. 현재는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 주요부분은 보존하며 역사의 교훈을 주고 있답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이렇게 보수되어 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2층에서 내려본 1층 홀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구조선은행 군산지점 2층 전시관에서 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역사 이야기를 전합니다.

 

 

2층 계단에 전시된 일제의 만행을 봅니다.

우리 농민들을 착취하는 일본 악덕농장주와 한 통속인 일본경찰이

우리 농민을 핍박하는 모습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너무나 큰 아픔에 농사를 지어도 모두 빼앗기고

배를 곯았던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군산은 북으로 금강, 남으로 만경강을 사이에두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무역항구로 번영을 누렸지만 외부 침입시에는

전쟁의 직접적인 현장이 되었답니다.

 

 

 

호남지역의 세곡이 집결되었던 진성창과 군산창이 설치되어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기벌포 전투, 고려시대에는 진포대첩의 현장이 되기도 했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수탈의 현장이 되기도 했지요.

 

 

 

군산을 포함한 호남곡창지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인이 

대거 유입되어 우리의 토지를 빼앗다 싶이 사들입니다.

"망망한 전주평야의 하유일망 5만석이 내다보이는 것이 1정보에

4.5원이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한국에 이주하라. 한국에 이주하라."

일본의 농민, 상인 그리고 부랑자 들이 일확천금을 꿈꾸고 너도나도

한국으로 몰려들었답니다.

 

 

 

당시 군산의 좋은 지역에는 일본인 거리가 조성되었고 

이들은 거류지 안에서 대한제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치외법권을 바탕으로

각종 행정 사무를 스스로 처리하였답니다.

 

일본인들은 군산 지방에서 매수한 경지가 100정보로

매우 많았으며 계속 한국의 땅을 매수하였습니다.

농민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져 가고 있었으며 농민은 토지를 

저당잡히고 고리대금업자에 매달리게 되었답니다.

일본인 간상배에 감언이설에 농토를 싼값에 팔아 넘기는

일이 암암리에 성행하다가 나중에는 공공연히 이루어졌답니다.

 

 

 

 

군산 근대는 거주민의 항거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한말의 의병활동으로 호남지방 맨 먼저 봉기한 3.1 만세의거, 

항만 노무자와 정미소 미선공들의 파업 소작쟁의 등은 고려 말부터

왜국와의 항쟁사를 이어온 끈질길 항일의 역사였습니다.

 

 

군산의 으병장 임병찬과 다른 의병장 칙령장 그리고 의병을 수감한

광주감옥 군산분감의 모습입니다.

군산지역의 항일운동은 한말 의병항쟁, 호남 최초 3.1운동과

1920~30년대 민족주의, 사회주의 운동 등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군산의 농민들은 거의 소작상태로 전락하고 일본인 농장에

가족까지 예속되어 봉건예속 농민이라는 천민집단으로 

갖은 고초를 당합니다.  농토는 농민의 생존기반이 되지 못했고

순 소작농과 반 소작농 모두 그 영세성으로 말미암아 독립가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군산항으로 반출된 쌀은 주로 현미였으며 수탈량은 

부산과 인천보다 훨씬 많았으며 이 쌀은 오사카와 고베 그리고 도쿄로 

보내졌답니다.

1933년 경우 수탈이 절정에 달해 전체 쌀 생산량의 53% 이상을 

일본으로 반출하였으니 우리나라 식량난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21년 군산의 미선공을 대표해 임만춘, 이성옥 등이 문맹의 미선공들에게

글을 깨우치는 사회교육을 목적으로 미선공  매가리 조합을 조직하였습니다.

기금 1,500여 원을 모아 나무와 기와를 날라 10여 칸의 조합사무소를 신축하고

1921년 9월 20일 낙성식을 하였으며 10월 1일부터 미선공 여성을 대상으로

학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 

군산의 사립 양영학교는 1918년 창성동 산동네에 정읍출신 부자인

한상설 씨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

일제가 우리라를 침략하던 시기에 활발히 추진된 교육구국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학교로 1910년부터 1919년 사이 항일 민족 교육운동의 맥을 

올바르게 걸어 온 학교로 빼앗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계몽교육을 택한 애국 사회운동의 현장이었답니다.

 

군산시 내항 부근에 위치한 구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의 2층 전시실에서

일제강점기 시대의 뼈 아픈 우리 역사이야기를 만난 날이었습니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