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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멋과 맛

서천여행 - 영원한 청년 -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by 하늘하늘하늘하늘 2018.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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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 263번지에는

종교가이며 정치가로 또 민족주의자로 민족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한 월남 선생의 생가지가 있습니다.


월남 月南 이상재 선생


답답한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먼저 가신 진정한 애국자인 선생을 생각해 봅니다.

선생의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월남이고 본명은 계호 입니다.

2017년 한산 모시축제 때 다녀 온 월남선생의 생가지와 전시관을 돌아 봅니다.



조선 후기 사회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

1972년과 1980년 두 차례 복원공사가 있었고 충남 기념물 8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 생가는 1955년에 훼손되었다 합니다.

복원된 생가모습





선생 생가지에서 보이는 관두봉 . 저 산 넘어로 금강이 흐르고 생가지는

명당이라고 합니다.


생가지에는 아직도 맑은 우물이 있습니다.

먹지는 않지만 이렇게 맑은 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생은 세계열강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려는 야욕으로 각축을 벌이던 시절에

독립협회 활동과 YMCA 활동을 통해 민족을 계몽하고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우리민족의 선각자이자 스승이셨습니다. 


고려 말 대학자이고 충신인 목은 이색 선생의 16대 자손 입니다.

일생을 청빈하게 삶을 산 정치가 이기도 했습니다.


1881년인 고종 18년 일본의 신사유람단으로 다녀오고

1888년에는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하여 관직에 있었습니다.


선생의 초가집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솟을 대문을 두었습니다.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농가분위기의 집입니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이 결국 그렇게 끝이 났지요.


선생은 일제하 감옥생활도 하였습니다. 앞 줄 원안의 선생 모습입니다.

뒷 줄 맨 좌측의 쇠사슬로 묶여있는 사람은 고 이승만   대통령의 청년 때 모습입니다.

일제의해 탄압을 받는 모습이지요.


선생의 생가지 전시관의 글귀 입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악랄한 일제하 시대였지만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며

온 국민이 선생을 애도하였습니다. 선생은 1927년 3월 29일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957년에는 천묘를 하고 제막식을 하는 자리에 

고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대통령의 지시로 묘를 옮겼다 합니다.

한산에 있던 선생의 묘를 부인의 묘가 있었던 양주로 이전 합장을 하였답니다.


민족의식 고취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을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싸운 이상재 선생의 전시관에는 선생의 벗들이 같이 합니다.


선생의 유물전시관에는 서점 132점, 임명장 6점 등

선생의 생전 사용하였던 물건 244점이 보존 전시되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 선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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